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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17일 말씀

등록일자
2011-08-18
  • 2011년 8월 17일 채플 말씀 영상

    <세브란스 직원예배/ 2011.8.17. 김학은 교수(본교 상경대학 경제학부)>

    세브란스의 유업
    (마태복음 21:3)

    말씀 (마태 21장 3절)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이 말씀을 "에이비슨 박사가 한국을 위하여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니 세브란스가 장로가 즉시 보냈다."라고 적용하면 오늘의 세브란스 병원과 연세의료원이 잘 설명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에 다른 문장을 보태겠습니다.
    "세브란스 병원은 우리나라의 서양의학의 발상지로서 서양문화를 직접적으로 가져오게 한 영예의 전통을 자랑할 수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에 전해온 근세의학의 역사 중에 가장 광채 있는 페이지를 차지한 것도 세브란스이거니와, 우리 의학의 발전적 과정에 있어서 민족적 고난과 호흡을 같이 하게 된 것도 세브란스 병원이다.“ ”세브란스의학대학은 일제의 압박에 항쟁하면서 영미 크리스트 각 교파들의 전도사업과 함께 미국의학제도에 의한 의학교육 및 의료사업을 꾸준히 확충하는데 많은 힘을 아끼지 않았다.“ 이 글은 연세대학교와 관련 있는 사람이 쓴 것이 아닙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김두종 박사의 한국의학사에 기록된 글입니다.
    오늘 저는 이 글에서 몇 가지 의미를 추구하면서 설교를 시작할까 합니다. 먼저 서양문화를 직접으로 가져왔다는 표현입니다. 알렌박사가 1884년에 입국하여 갑신정변이라는 천지개벽을 당하는 가운데 침착하게 대처하여 왕실의 신뢰를 얻게 된 것은 기적입니다. 1784년 소수의 선비가 명례방에서 천주교 서적을 읽으며 시작했던 천주교. 그 박해와 순교로 얼룩진 100년의 역사가 하루아침에 자유를 찾게 되는 순간은 기적이 아니면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이 기적이 있었기에 오랫동안 미신과 질병에서 헤매던 조선에서 기독교와 근대의학이 드디어 사람의 마음을 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근대의학이 일본을 거치지 않고 미국에서 직수입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실로 세브란스 의학의 시작은 이 땅의 암흑시대의 종언이 되었습니다.
    민족적 고난과 호흡을 같이 하게 되었다는 표현 역시 범상하지 않습니다. 일본이 한꾸을 병탄한 1910년에서 보았을 때 그 이전 25년은 세브란스를 기점으로 서양선교사가 구축해 놓은 교육이 크게 성장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일본은 이 점을 몹시 우려했습니다. 그 결과는 역사가 증언하듯이 105인 사건입니다. 기독교 교육을 말살하려는 음모와 박해가 9년 동안 계속되었고 드디어 삼일운동을 야기하였습니다. 사립학교령을 반포하고 개정하면서 세브란스를 비롯한 기독교 학교에서 성경과 예배를 금지가 바로 민족적 고난입니다. 1900년 이 땅에서 처음 신약성서가 완역되어 한글성서를 읽게 된 때에 이러한 고난은 한글을 말살하려는 획책으로 이어집니다.
    일제의 압박에 항쟁한다는 것은 또 무슨 말입니까. 김필순, 박서양, 이태준을 비롯한 초기 졸업생들이 독립운동에 뛰어든 것. 이것은 서양선생들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가르쳤기에 일신의 영달을 버리고 그 험한 길을 택한 것을 보면 그 대답은 자명합니다. 이상은 세브란스의 유업의 시작일 뿐입니다. 암흑시대에 서양 사람들이 한국인의 지적수준을 의심하여 중등교육 정도로 만족하고 이것을 이어서 일제도 한국인에게 고등교육을 철저히 외면하게 되지만, 에이비슨 박사와 세브란스는 처음부터 대학 그것도 그 어려운 의과대학부터 시작한 것이 그 유업의 핵심입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아프리카에서 인술을 펼치고 그것으로 노벨상도 수상하였지만 의학대학을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제1회 졸업생이 성공적으로 배출되고 앞날이 약속되자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이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 우리도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구나! 이 희망은 이 땅의 유지들에게 전염되어 민립대학 설립운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여기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1926년에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하며 법문학부와 함께 의학부를 두었습니다. “외국인이 경영에 관계하는 불완전한 사립대학이 관립대학 보다 먼저 설립된다는 것은 통치 상 크게 우려할만한 일이 되지 않을까 두렵다.” 결국 그들은 세브란스를 비롯하여 다른 대학에게 대학인가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두려웠던 것입니다.
    세브란스는 누구입니까. 그는 친구인 록펠러와 함께 스탠더드 석유회사를 세운 사람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번 돈으로 전업 선교자선가가 된 사람입니다. 동시대에 그를 평한 글에서 그의 업적을 알 수 있습니다. “평신도선교대회에 위촉을 받고 선교운동에 뛰어든 사람 가운데 완벽하고 독립적이면서 가치 있는 업적을 이룬 사람이 클리브랜드의 세브란스이다. 그는 훌륭하게 훈련된 정신을 선교현장의 여건을 조사하는데 쏟았다. 그처럼 자신의 사명에 시간을 다하고 해외선교현장을 정직하게 조사하는 일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야 한다. 교역자나 평신도나 그의 의견과 판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에이비슨 박사가 1900년 뉴욕에서 개최된 에큐메니칼 선교대회에서 세브란스를 만난 것이 또 하나의 기적으로 기록될 수 있습니다. 에이비슨 박사는 그의 회고록에서 우연이라는 말을 연속적으로 쓰고 있지만 우연이 여러 번 겹치면 그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세브란스라고 손을 벌리는 아무에게나 자선을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엄격한 기준이 있었습니다. 상대방의 인품과 그가 하고자 하는 하나님 사업의 내용입니다. 요즈음도 미국에서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거액을 성큼 내주기 어려운 세상인데 그 당시야 말할 것도 없었을 겁니다. 에이비슨 박사가 그에게 합당한 인물이었던 것이 또 하나의 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알렌 박사는 뉴욕선교본부에 보낸 편지에서 “드디어 귀하는 제1급의 사람을 갖게 되었습니다.”라고 극찬을 합니다. 언더우드 박사 역시 확실한 신뢰를 보냅니다. “귀하가 한국을 위해 하신 일 중에서 에비슨 박사를 임명한보다 더 좋은 일은 없습니다. 그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성공하려고 단단히 결심하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힘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에이비슨 박사는 뉴욕에서 행한 어느 연설에서 그의 꿈을 나타냅니다. “한국정부가 의학교를 설립할 때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현지 청년을 그 학교에 보내면 믿음이 없는 단순한 의사만 길러낼 것이다.” 에이비슨 박사는 근대의학의 불모지인 한국에 기독교 정신으로 무장한 의사를 교육시키고 그 학생이 또 같은 정신의 의사를 길러내고, 끝없는 번복을 통하여 이 땅에 복음과 의학을 전파할 기회를 포착했다고 확신하고 그 꿈을 두려움 없이 추진한 것입니다. 그 꿈의 실현을 감당할 사람, 에이비슨 박사의 표현을 빌리면, 자비로운 독지가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세브란스 장로입니다. 두 사람의 꿈이 합쳐져 오늘의 세브란스의학교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위대한 유업은 전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여러분과 저의 가슴에 지금도 고동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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