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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28일 말씀

등록일자
2011-09-29
  • 2011년 9월 28일 채플 말씀 영상

    <세브란스 직원예배/ 2011.9.28. 정현철(암센터 원장)>

    사회속에서 성숙하는 마음
    (로마서 12:2)

    오늘 세 번째로 강단에 섰는데, 첫 번째, 두 번째 모두 축구 얘기를 했었습니다. 축구에서 승부차기를 할때 키커와 골키퍼가 모두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은 과연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실까?”로 첫 번째 말씀을 드렸고, “승부차기를 할때 나는 우리팀의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기도는 상대방의 승리를 위해 기도를 한다면 기도를 들어주실까?“로 두 번째 말씀을 드렸습니다.

    축구시합도중 관중석의 조그만 싸움이, 축구장 바깥의 난동으로 퍼져 집단 강도를 하거나 가게를 때려 부술때, 우리는 종종 각 개개인이 왜 그런 분노를 느끼게 되었는지를 분석합니다. 그러나 집단의 행동결과는 특정 사람들의 의도에서 비롯되지 않을때도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인간사회가 돌아가는 어떤 법칙과 규칙성을 사회물리학(social physics)이라는 분야로 발전시켜 그 연구결과를 네이쳐지에 싣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축구장 난동과 같은데서 관찰할수 있는 인간사회의 네가지 규칙성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첫째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억압받는 소수가 되기를 꺼립니다:
    2가지 예를 보여드리겠습니다
    1) 독일의 작가 세바스티안 하프너는 나치의 적이었던 자기가 어떻게 나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는지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1930년대 중반 갈색셔츠의 나치 돌격대가 거리를 행진했고, 적극적으로 환영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구타하였습니다. 나치에 반대하던 하프너와 같은 사람들은 소극적 저항 방식으로 집으로 숨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비롯한 소극적 반대 학생들에게 모두 교화캠프로 입소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하프너는 스스로 갈색셔츠를 입고 똑같은 행진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탄압받는 소수가 되기 싫어서 자신도 모르게 다수의 억압자로 변했다고 하였습니다.

    2) 스탠퍼드 대학교 짐바르도 심리학교수의 연구결과입니다. 이 연구내용은 “디 익스페리먼트”라는 제목으로 영화로도 만들어져서, 이중에는 그 영화를 보신분들이 있을겁니다. 짐바르도 교수는 심리학과 지하를 교도소로 꾸민후, 선량하고 우수한 학생들로만 지원자들을 받아서 무작위로 간수와 죄수로 구분한 다음, 죄수에게는 죄수번호를, 간수에게는 선글라스와 교도관님이라는 호칭을 주고서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고 그냥 두 집단을 두었습니다. 실험의 목적은 학생들이 개인성이라는 껍질에서 벗어나서 대립되는 두 집단으로 존재할 때 어떤일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었습니다. 실험이 시작되자, 간수들의 죄수에 대한 적개심과 학대는 나날이 심해졌고, 2주 예정이던 실험이 완전이 통제 불능이 되어서 6일만에 종료하였습니다. 평화주의자여서 선택되었던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가학적으로 행동했고, 본적도 없던 학생이었지만 죄수라는 사실만으로 그들을 잔혹하게 처벌하면서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학대에 가담하는 학생들이 점점 더 늘어나면서, 죄수는 인간이 아니며 학대해도 좋다는 개념이 간수사이에서 발생하고 이를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이 실험의 결론은, 사람은 자신의 안전과 이득을 위해서는 평소에 하지 않던 행동을 스스럼 없이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던날,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옆에 있던 비자가 “베드로 너도 그의 제자다“라고 할 때, 베드로는 부인했습니다. 세 번째로 “너는 분명 그의 당이다”라고 했을 때, 베드로는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주변이 모두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야 한다는 사람들로 가득한데서, 혼자 있기가 무서웠습니다. 부인하고 맹세 한 것도 모자라 저주까지 한, 괴물같이 변한 자기 자신을 보고, 새벽닭이 울때 베드로도 베드로 자신의 행동에 놀랬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안전을 찾고자한 세바스티안 하프너나 간수역할을 한 학생들과 같은 경우입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마저 십자가를 외면하였을 때에, 흘로 골고다의 언덕을 오르심으로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2) 사회속에서 인간의 두 번째 특성은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으로 자기가 편한 흐름을 찾는 것입니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편하고자 하는 두가지 예입니다.
    1) 아주 쉬운 문제입니다. 공과 방망이의 가격의 합이 1.1달러이고, 방망이가 공보다 1달러 비싸다면, 공과 방망이의 가격은 각각 얼마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 프린스턴 대학생의 50%가, 미시간 대학생 56%가 틀린답을 내놓았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방망이 1달러, 공값이 0.1 달러라고 했습니다. 정답은 방망이 1.05 달러, 공 0.05달러입니다. 우리의 시각은 이처럼 뇌의 산수능력을 뛰어넘어 1.1을 1과 0.1로 나누는 것을 본능적으로 보다 편안해합니다.

    2) 또 다른 예입니다. 음반가게에서 15달러짜리 CD를 사는데 2분거리에 있는 다른 가게에 가면 5달러 더 싸게 살수 있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가게로 걸어가서 5달러를 아낍니다. 반면 500달러 가죽점퍼를 살 때 2분거리 가게에 가면 495달러에 살수 있다고 해도 대부분은 그냥 500달러에 삽니다. 똑같은 5달러인데 인간의 본능은 그 점에 동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능은 같은 5달러를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가치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예수님 모두 육신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모두 사탄으로부터 인간의 기본본능이고 가장 치명적인 약점인 식욕을 자극하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아담은 유혹에 넘어갔을 뿐 아니라, 이브가 주어서 먹었다고 이브의 탓으로 돌려서 책임으로부터 안전하고자 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사람이 빵으로만 살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것이다”라고 하시면서 본능을 물리쳤습니다.

    (3) 인간사회에서 세 번째 규칙은 인간은 동일 집단속에서 스스로 자기 조직력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고속도로에서 교통상의 장애가 있어서 서행을 하게 되면, 모든 차들은 일열로 서서히 주행하게 되며, 이 경우 하나의 동일 집단이라는 일체감을 갖습니다. 그런데 중간에서 갑자기 한 대가 튀어나와서 추월을 하려고 하면 모두가 서둘러서 앞차와의 간격을 좁혀서 자기 앞으로 이차가 끼어들지를 하지 못하게 합니다. 아무도 미리 약속한 행동이 아니지만 전체가 하나로 행동합니다.

    사회속에서 사람들의 행동은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에 크게 좌우 됩니다. 특히 자기의 중심이 잡혀져 있지 않는 경우에 더 심합니다. 교도소의 예처럼 선량하고 지적인 젊은이들이 상황에 따라서는 흑백도 뒤바뀔수 있다는 생각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것은 심상치 않는 문제입니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사람들이 세상을 인지하는 방식이 본능에 의해서, 즉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는 주어진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변할수 있음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CD와 가죽자켓을 살 때 본능이 평가하는 서로 다른 5달러의 의미입니다. 한 가지 더 잔인한 경우를 예로 들겠습니다.

    세르비아 사람들이 축구경기장에서 1000명이 넘는 보스니아 사람들을 학살했다고 보스니아의 UN대사가 워싱턴 포스트 기자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그때 이기자는 “절대로 그런일이 일어날 수 없다”라고 말하고 조사를 안했습니다. 나중에 확인된 바로는 기자가 옳았습니다. 1000명을 처형한것이 아니고 소년과 남자만 골라서 8000명 넘게 학살을 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후 유럽에서 벌어진 가장 큰 학살이었습니다. 이 기자처럼 우리는 악을 헤아리는데 필요한 상상력이 부족합니다. 대량학살이나 집단 폭력에서 우리는 광기와 사악함을 보면서도, 그 원인을 한 미친 지도자나 소수집단의 비정상정인 성격탓으로 돌리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1915년 아르메니아, 2차대전중 나치 독일, 1994년 르완다등 비슷한 참사가 사실은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자행된 사건입니다. 세르비아 사람들이 죽인 강건너 크로아티사람들은, 매년 서로 추수를 도와주고, 어려서부터 더운 여름날 같이 벌거벗고 강에서 수영하며 놀던 친구들이었습니다. 크로아티아 생존자의 말입니다. "우리는 친구였고 기쁜일과 슬픈일을 늘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증오의 먹구름이 우리를 덥쳤습니다. 이웃끼리의 인사 방법이 어느새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방법이 되었습니다. 어제까지는 좋은 친구였는데 이제 더 이상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끔찍한 짓을 저지른 이 평범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나중에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평범한 생활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한 집단의 구성원은 뭔가를 공유하는데 이것은 국적일수도 있고 피부색이 될수 있습니다. 우리는 왜 축구장의 패싸움에서 처럼 한번도 본적이 없는 사람들을 증오하는지 잘 묻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눈먼 편견이 사람들을 단결시키는 요인이 됩니다. 세르비아 사태처럼 다른 인종이 갑자기 위험인물로 보이게 됩니다. 이러한 편견으로 사람들은 어느날 갑자기 알아볼수 없을정도로 변하고, 예전에는 꿈도꾸지 못할일들을 짐바르도 교수의 실험에 참여한 학생들처럼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게 됩니다.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들이 왜 하프너처럼 집단적인 광기속으로 허겁지겁 뛰어드는 것일까요? 합리적인 판단으로 결단있는 행동을 할 경우, 그가 속한 공동체에서 낙인찍히는 또 다른 고통을 겪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집단의 부도덕한 압력에 굴복하지 않을때에는, 뇌의 활동이 주로 감정이 관여된 곳에서 집중적으로 일어남을 발견하였습니다. 즉, 다수의 집단에서 벗어나 약자인 소수가 되면, 본능적으로 위험하다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세바스티안 하프너, 베드로 모두가 보여준 행동입니다. 사회속에서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마음의 중심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4) 마지막으로 사회속에서 인간의 으뜸된 행동특성은 자기의 안전을 위해서는 쉴새없이 모방과 적응한다는 것입니다:
    작은 기업에서 성과는 구성원 각 사람에게 달려있어서 아무도 무임 승차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업이 커지면 많은 경우에서 야심이 없는 개인들이 무임승차를 하기 시작합니다. 불행하게도 열심히 일하던 일부 사람들이 자기 노력의 성과가 게으름벵이에게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금방 그들을 따라 무임승차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일 잘 하던 사람들은 그 회사를 나와서 독립을 하거나, 무임승차자들이 없는 다른 기업으로 이동을 했었습니다. 그 결과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새로운 기업은 커지고 이전의 기업은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기업도 무임승차자들로 오염되었고, 이러한 반복은 끊임없이 계속되었습니다. 1980년 대 상위 5000개 대기업중 살아남은 것이 절반도 안된 이유입니다. 그래서 집단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구성원의 응집력을 이끌어내는 리더쉽이 필요한 것입니다. 콜린 파월은 “아이러니하게도, 어려운 결정을 무작정 미루는 것, 단 한 사람의 마음도 불편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 기여도와 상관없이 모두에게 똑같이 잘해주는 것, 리더의 이런 행동 때문에 정말로 떠나는 사람은 그 조직에서 가장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사람들뿐이다” 라고 했습니다. 연세의료원의 교직원은 모두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리더입니다. 사회속의 한 구성원으로서, 그리고 그 사회의 구성원을 책임지는 리더로서 여러분의 올바른 역할에 대해 항상 고민하셔야할 이유입니다.

    축구장에서 난동시에 맨 처음 소요를 일으킨 사람은 완전히 자기뜻으로 그렇게 합니다. 하지만 그후 100명의 사람이 더 난동을 부리게 되면 101번째 사람의 판단은 완전히 다릅니다. 자기가 아는 모든 사람이 난동을 부리고 있다면 난동에 뛰어들기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난동에 뛰어들지 않는것이 어려워집니다. 어떤 사람은 10명이 난동을 부리고 있으면 뛰어들고, 다른 사람은 60-70명은 난동을 부리고 있어야 가담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난동참여도가 개인적인 선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느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점이 사회속에서 인간의 본능입니다. 짐바르도 교수의 연구에서 처럼, 학대에 가담하는 학생들이 점점 더 늘어나면서, 죄수라는 사실만으로 그들을 잔혹하게 처벌하면서 즐거움을 느낀것입니다. 멀쩡하던 친구들이 청군과 백군으로 나누어 운동회 하라면 서로 잡아 먹을듯이 사나워 지는 것은 모두 경험해보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판단으로 행동하는 수만명의 사람들이 이방인 수만명을 살해한 일을 독재자 한사람의 탓으로 돌리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나치가 독일을 지배한 것은 히틀러 한 사람 때문만이 아니라 독일 국민의 일시적인 분위기와 독일국민들의 성격이 히틀러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도록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연세의료원 구성원 각자는 어떠한 메시지를 받아서 어떤 사회를 이루도록 준비되어 있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인 로마서 12장 2절은 현대적으로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문화에 너무 잘 순응하여 아무 생각없이 동화되어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대신에, 여러분은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십시오. 그러면 속에서부터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는 문화는 늘 여러분을 미숙한 수준으로 끌어 낮추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여러분에게서 최선의 것을 이끌어 내시고 여러분안에 멋진 성숙을 길러주십니다. 성경은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우리 자신이 변화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연세의료원의 교직원은 본능이 이끄는대로 다수속에 숨어서, 다른 사람을 모방하면서 자신만의 안전을 유지하려고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만의 안전을 위해 이 사회와 세태에 쉽게 순응하지 말고, 자신을 먼저 훈련하고 변화시키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사회속에서 성숙하는 마음을 가질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다른 사람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내가 하는 말을 두려워하도록 준비가 되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만, 승부차기 때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실 겁니다.

    오늘 말씀드린 내용은 버지니아 대학교에서 물리학 박사를 받은 후, 네이쳐지와 뉴사이언티스트 편집자이며, 뉴욕타이즈 컬럼니스트인 마크 뷰케넌 박사가 쓴 The Social Atom, 우리말로는 사회적 원자로 번역된 책을 참고로 했습니다. 시간이 되시는 분은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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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04월 08일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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