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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21일 말씀

등록일자
2012-03-23
  • 2012년 3월 21일 채플 말씀 영상

    <최형철 목사(세브란스병원)>

    고귀한 창조물 - 창1:27, 마태복음 25:40

    3년전 미국병원에서 1년간 임상목회교육 연수를 받을 때였습니다. 훌륭한 수퍼바이저 밑에서 좋은 임상목회교육과 목회시스템을 배운 것은 큰 행운이자 축복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좋았던 것은 다양한 교파의 미국교회와 한인교회를 탐방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몇몇 한인교회에서는 설교할 기회도 가졌었습니다.

    그때 방문한 한인교회 중 한 곳의 예배는 지금도 가끔 기억이 납니다. 그 교회는 뉴욕외곽에 있는 꽤 큰 한인교회였습니다. 그날 제가 탐방한 부서는 사랑부예배였습니다. 사랑부는 장애아이들, 특히 뇌성마비, 정신지체 아이들이 드리는 예배였습니다. 아이들은 15명쯤 참석했고, 교사들도 아이 1명당 1명이상이었고, 교육전도사님은 여자전도사님 1분, 남자 전도사님 1분이었습니다. 두 전도사님이 번갈아가며 설교를 하는데, 그날은 여자 전도사님이 예배 인도 및 설교를 하는 날이었습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여자 전도사님이 아이들에게 예쁜 초를 하나씩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마지막 아이때는 준비된 초가 다 떨어졌습니다. 결국 전도사님은 마지막 어린이에게는 따로 준비한 조금 덜 예쁜 초를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도사님은 대림절 초의 의미를 설명하고 나서, 아이들에게 가지고 있는 초에 불을 붙이라고 합니다. 옆에 있는 선생님들이 불붙이는 것을 도와주었지만 어느 초도 촛불이 타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맨 마지막에 받았던 조금 덜 만들어진 초에만 촛불이 붙었습니다.
    그 여전도사님이 말씀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겉으로만 예쁜 초들은 심지가 망가져 초에 불이 붙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덜 만들어진 초는 심지가 멀쩡했기에 초에 불이 붙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우리가 덜 만들어진 이 초처럼 보일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들이 보기에 그럴 뿐이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모두 소중하게 만드셨어요. 초가 겉으로만 모양이 예뻐도 심지가 없으면 소용이 없고, 덜 예뻐도 심지가 바르면 초의 원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것처럼, 사람도 겉모양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는 것이 중요해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대로 우리가 사는가 하는 것이예요.우리는 고귀한 하나님의 창조물이에요. 당당하게 사세요. 우리는 어떤 경우이든 여전히 하나님의 고귀한 창조물이예요“
    참으로 감동스러운 설교였습니다. 더군다나 설교를 하시는 그 여전도사님이 바로 뇌성마비로 장애를 갖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넘어질 듯하면서도 꼿꼿이 잘 서 있고 어눌한 발음이면서도 깊이있는 그러면서도 당당한 그 설교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리고 사랑부의 남자 전도사님은 비장애인이었는데, 그 남자 전도사님은 바로 그 여자 전도사님의 남편이었습니다. 부부가 공동으로 한 부서를 담당한 것이지요. 두 사람 사이에는 7살, 5살, 1살 이렇게 3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삶의 모습 자체가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 여자 전도사님은 초등학교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이민가기전까지 우리 세브란스 재활병원을 다녔기에 세브란스병원에 대해 매우 좋은 추억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브란스에서 온 저를 너무나 반가와하고 잘 대접해 주었습니다.

    이 여자 전도사님이 설교한 희망의 메시지는 저의 삶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저의 외할아버지는 일제시대때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루신 그 당시에는 많은 활동을 하신 훌륭한 목사님이셨습니다. 제가 태어나고 몇년 후 돌아가셨고,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어 계신데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입니다. 저희 아버님도 대학생때 외할아버님을 존경해서 따라 다니다가 사위가 되었고요.
    저희 아버님은 군에 장교로 계셔서 저를 포함해 3남 1녀를 기르신 어머님이 전방부대따라 다니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48년전 오늘, 막내인 저를 낳으셨습니다. 그런데 산모의 영양실조가 아이에게 영향을 끼쳐 아이가 약하게 약간의 장애를 갖고 태어나게 되었지요. 그 당시 의료진도 이 아이가 어떻게 자랄지 모르겠다는 대답밖에는 못 주었고요.
    이 아기를 업고 저희 부모님은 목사님인 외할아버님께 갔습니다. 그때, 외할아버님은 모든 생명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귀한 생명이라며 이 아이가 건강히 자라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쓰임받을 것이라는 예언과 축복을 해주셨습니다. 그것이 저희 부모님의기도와 희망이 되었습니다. 다행히 별탈없이 자랐습니다. 제가 자라면서 외할아버님이 하신 이야기를 자주듣게 되고 외할아버님 같은 목회자를 꿈꾸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외할아버님의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는 그 희망의 말씀은 저의 신앙적, 신학적 고백이 되었고 제가 병원에서 사역하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많은 역사학자, 사회학자들이 21세기에 각 나라가 극복해야 할 차별의 문제로 다음의 3가지를 꼽습니다. 이 3가지 차별을 잘 극복하는 나라가 선진국 대열에 낄 것이고, 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나라는 진정한 복지국가라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3가지 문제 중 첫째는 남녀 차별의 문제입니다. 둘째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차별문제입니다. 셋째는 인종간의 차별의 문제입니다. 특히 이 인종차별의 문제는 우리에게도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2500여명의 학자와 전문가들이 모인 유엔세계연합 미래전망보고서에서 현재 한국사회의 이슈를 저출산과 다문화가족으로 보았습니다. 지금은 한국의 다문화 가정은 그 수가 1백만인데, 10년후에는 4백만으로 급증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다문화가정을 어떻게 소화해 내느냐에 한국의 미래가 달렸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차별의 문제를 기독교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이 바로 오늘 봉독한 두 말씀입니다. 구약적 배경으로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고귀한 존재라는 것이고, 신약적 배경으로는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는 것이 바로 주님을 섬기는 것과 같다는 것이지요.
    황제나 백정이나 모두 고귀하게 여기고 치료한 우리 세브란스의 역사와 정신은 바로 이를 실천한 것이고, 앞으로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지향점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정신과 관련해 기억남는 환자 한 분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암으로 진단을 받은 60대 초반의 여성 환자분이셨습니다. 전주 외곽에서 농사를 짓는 분이셨는데, 가부장적인 남편 밑에서 주눅 들어 사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가족 중에는 그 분만 교회를 다니는 집사님이셨습니다. 배움이 많은 것도 아닌데, 신앙생활을 해서 그런지 말씀도 잘하고 경우도 바른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없으면 신앙 얘기도 잘하고 자기 표현도 잘하는데 남편만 나타나면 어찌할 바 모르셨습니다. 솔직히 이런 분이 어떻게 저런 경우없는 남편과 살까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분이 다닌 시골교회는 교인도 몇되지 않았는데, 최근에 새로 오신 목사님이 재정 문제로 교인들과 다투어 교인들이 모두 다른 교회로 떠났습니다. 그래서 현재 교인은 이분 한명이었고, 목사님도 결국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이분이 암진단을 받고 지방에서 우리 병원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이 분이 그 힘든 상황에서도 한편으로 위안을 받았던 것은 세브란스 의료진의 관심과 사랑이었습니다. 그분을 담당했던 의료진들이 정성을 다해 돌보고 친절해서 참으로 고마워했습니다. 평생 시댁과 남편에게 무시받고 살았던 분이었기에 의료진의 사랑과 친절은 그분에게는 감동적인 것 이었습니다.
    이분에게 또 하나 위안이 되었던 것은 언제든지 기도할 수 있는 예배실과 자신을 위해 기도해 주는 목회자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자신이 암에 걸렸는데, 주변에 신앙인은 아무도 없는 상태였지요. 자신을 위해 기도해 주는 분이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자신을 위해 기도해 주는 분들이 세브란스에 있다는 것이 이분에게는 커다란 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의 질병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남편은 일방적으로 집근처의 요양병원으로 옮기는 절차를 밟았습니다. 사실상의 포기이지요.
    이분이 우리 병원을 퇴원하던 날 저에게 그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 저에게 더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도 슬프지만, 이런 저를 위해 기도해 줄 사람이 이제는 더 이상 없다는 것이 너무나 슬프네요. 이제 저가 기도할 곳도, 저를 위해 기도해 줄 사람도 없네요. 이런 저를 보니 어젯밤에는 기도가 나오지 않고 눈물만 나왔어요”
    참으로 너무나 안타까왔습니다. 저도 할말이 없더라고요. 그분이 눈물흘리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마침 머릿 속에 떠오르는 복음 성가가 있어서 어떤 말보다도 그 찬양이 위로가 될 것같아 그 찬양을 그분께 들려드렸습니다. 마침 환자나 보호자들이 그 방에 거의 없어 조용히 부를 수 있었습니다.
    그 찬양은 <누군가 기도하네>였습니다. 지금 영상물에도 게시가 되고 있는 것처럼 가사는 다음과 같지요.
    “마음이 지쳐서 기도할 수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때/ 주님은 우리 연학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누군가 너를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때/ 누군가 널위해 기도하네”
    “집사님 여기서의 누군가는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예요. 집사님이 기도할 수 없는 그 순간에도 아무도 없는 그순간에도 예수님은 집사님을 위해 기도하고 계세요. 그리고 제가 집사님을 기억하고 기도할께요”
    그 집사님은 제가 적어 준 이 찬양가사를 성경책 사이에 꼭 끼워갖고 퇴원을 하셨습니다. 그분이 마지막에 그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나같이 미천한 사람을 위해 사랑을 베풀어주고 기도해 준 세브란스병원은 복받을 거예요. 저도 세브란스병원을 위해 기도할께요”

    “나같이 미천한 사람을 위해 사랑을 베풀어주고 기도해 준 세브란스병원은 복받을 거예요. 저도 세브란스병원을 위해 기도할께요” 이 말씀이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런 분들의 기도 때문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고 믿습니다. 이런 분들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소중한 존재임을 고백하며 섬기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맡겨진 거룩한 사명이라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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