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인메뉴로 바로가기
콘텐츠 바로가기
하단메뉴로 바로가기



채플동영상

HOME 안에 사명구현 안에 원목실 안에 채플동영상

2012년 4월 25일 말씀

등록일자
2012-04-27
  • 2012년 4월 25일 채플 말씀 영상

    <권호근 치과대학장>

    신앙인의 자아

    진정한 삶, 윤리적인 삶, 주체적 삶은 누구나가 바라는 삶입니다.
    이러한 삶의 출발점은 자신의 내부 힘을 인식하는 것 즉 내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아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오늘 말씀드릴 주제는 자아입니다.
    흔히 사람은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이 되면 거울에 비친 이미지를 자신의 자아라고 인식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자아가 아니고 거울에 비친 허상입니다. 혹자는 이러한 허상을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의 자아라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중국 고사에 군자는 유리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기 보다는 사람들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거울에 비친 모습은 허상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렸을 때 자아는 본능적 자아입니다. 즉 본능에 의해서 지배 받는 자아입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예로부터 논란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순자의 성악설과 맹자의 성선설입니다. 순자가 성악설을 주장 한 것은 인간의 악함을 강조하려 한 것이 아니고 인간은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하는데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라서 공동체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한 것입니다. 반해서 맹자의 성선설은 유교의 인의예지에 입각하여 인 (측은지심), 의 (수오지심), 예 (사양지심), 지 (시비지심)이 있음을 강조하고 그 중에서 인간 모두에게는 측은지심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복잡한 존재인 인간의 본성을 이분법적으로 정의 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모든 생물체의 본성은 생존과 종족 보존 두 가지로 요약 될 수 있습니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어서 인간의 본성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이대 본능인 식욕은 생존을 위한 것이고 성욕은 종족 보존을 위한 것입니다. 식욕, 성욕 모두 강력한 본능입니다. ‘사흘 굶고 도적질 안하는 사람 드물다’는 옛말도 있습니다.
    수도원 중에 관상수도원이 있습니다. 이곳 수도원의 수도자들은 신과 마주하기 위하여 세상으로부터 자발적으로 격리되어 정결, 순명, 노동을 통한 자급자족, 묵상 기도로 평생을 사는 어떻게 보면 감옥과 같은 곳입니다. 마쓰시다 공업 고노스케 회장에 의하면 수도원과 감옥의 차이는 하나라고 합니다. 사는 사람이 불평불만하면서 살면 감옥이고, 감사하면서 살면 수도원이 된다고 합니다.
    직장도 마찬가지로 불평 불만하면서 억지로 일하면 감옥이 될 수 있고, 감사하면서 일하면 수도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은 모두 마음 먹기 나름입니다. 전에 관상수도원을 취재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본적이 있습니다. 인터뷰어가 나이든 수사에게 수도원 생활에서 가장 힘든 것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나이든 수사가 성욕을 억제하고 극복하는 것이라고 대답하는 것을 보고 성욕도 식욕만큼 강한 욕망이라는 것을 다시 느끼게 되었습니다. 만약 인류가 강력한 성욕이 없다면 오늘날 같이 인류가 번성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피터데이비스라는 사회진화론자가 쓴 ‘욕망의 진화’란 책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선택설(natural selection) 보다 성선택설(sex selection)을 주장합니다.
    아무리 환경에 잘 적응하여 생존 하였다고 하여도 짝짓기에 성공하지 못하면 그 유전자는 후대에 전달되지 못한다는 주장입니다. 동물세계를 보면 보호색을 포기하고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화려한 깃털을 가진 공작과 같은 조류나 큰 뿔을 가진 순록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암컷으로부터 선택 받아서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하려는 동물들의 필사적인 노력입니다. 죽을 줄 알면서 짝짓기를 하는 사마귀나 거미를 보면 종족 보존에 대한 경외감을 느낍니다.
    저자의 주장에 의하면 현재까지 생존한 모든 생물들은 성 선택에서 선택되었다는 점에서 성적으로 모든 매력이 있는 존재다. 속된 말로 모든 생물체에는 바람기 본능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자가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바람기 본능이 있기 때문에 불륜 행동을 합리화 하자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바람기의 본능 때문에 한 부부가 평생 부부관계를 유지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 쌍의 부부가 평생을 같이 하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은 성공적이고 훌륭한 삶을 살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십계명에 도둑질과 간음을 금한 것은 이것이 고대부터 인간이 흔히 범하기 쉬운 죄라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 욕망에 휘둘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말하는 원죄도 과학적으로 설명하면 인간 유전자의 이기적인 속성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에는 이기적 속성과 이타적 속성이 같이 있습니다. 종족의 보존을 하기위해서는 이기적으로만 행동해서는 안 되고 협조와 공존의 행동이 더 합리적입니다. 즉 이타적인 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아메바 종은 개체가 갑자기 증식되어 서식환경이 악화되면 일부 아메바가 스스로 죽어서 딱딱한 기둥을 만들어 남은 아메바가 다른 웅덩이로 이동 할 있도록 하여 공멸을 면한다고 합니다.
    생물학적으로 취약한, 인간이 번성 한 것은 협조와 공존이라는 이타적인 본능이 지속적으로 계승되었기에 가능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인간은 악하기도 하지만 선한 존재입니다.
    연세의료원은 강한 조직입니다. 현대식 큰 병원건물이 있어서 강한 조직이 아니고 협조와 공존이라는 이타적 기독교 조직 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강한 조직이라고 생각합니다. 연세의료원이 128년간 지속되었지만 앞으로도 계속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좋은 문화는 지속적으로 계승 발전 되어야 합니다.
    진화론에서는 강한 종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종자가 강하다고 합니다. 연세의료원도 변화무쌍 21세기에 환경에 잘 적응해야 지속적으로 발전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인간은 사춘기를 지나면서 이성이 생기고 이성으로 자신을 들여다봄으로써 내안에 또 다른 내가 있음을 인식하게 됩니다. 즉 이성적 자아를 인식하게 됩니다. ‘나는 누구인가?’ ‘신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등 이성을 통한 사고를 시작합니다. 이성을 언급한 철학자는 잘 알다시피 근대를 탄생시킨 데카르트입니다. 데카르트는 명백하게 증명 될 때까지 모든 것을 의심하라고 합니다. 이러한 의심을 통하여 확실성 추구라는 과학적 방법론 때문에 서구는 자연과학과 의학이 발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데카르트를 자연과학과 의학의 시조라고 합니다. 데카르트하면 우리는 Cogito ergo sum, 한자로 하면 我思故我在를 떠올립니다. 모든 것을 의심하지만 사고하는 나 자신만은 의심 할 수 없다. 즉 강력한 에고 주체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 나는 필연적으로 존재하고 고로 나를 창조한 하나님의 존재도 부정 할 수 없다. 고로 신은 존재한다. 또한 내가 사고하는 존재이므로 나를 창조한 신도 사고하는 존재이고 완전하고 무한하고 신실한 존재이다. 라고 신의 존재를 논증합니다. 데카르트는 거울에 비친 모습은 허상이고 이성으로 사고하는 이성적 존재가 나의 진짜 자아라고 주장합니다.
    사춘기를 지나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 사람들은 사회에 의해서 규정되는 사회적 자아가 생깁니다.
    심리학자 구스타프 칼융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페르소나를 쓰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페르소나는 고대에 희랍 배우들이 연극 할 때 쓰던 가면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인생은 페르소나를 쓰고 하는 연기하는 3막 3장의 연극입니다. 버나드 쇼의 에세이 Show must go on에 나오는 내용처럼 슬프나 즐거우나 우리는 show must goon 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 모두는 삶을 위하여 또한 가족을 위하여 슬프고 아픔이 있어도 이를 감추고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서로 위로해 주고 보듬어 주어야 할 존재들입니다. 사회적 생활을 잘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성적 자아와 본능적 자아를 억누르면서 사회적 자아에 충실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아는 우리의 진정한 모습이 아닙니다. 억눌린 자아입니다.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차이는 사회적 자아 이외에 또 다른 자아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 되는 자아, 즉 하나님의 눈이 비친 자아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자아야 말로 우리의 진정한 자아입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인 신명기 11장 12절에 나오는 하느님의 눈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릴 쳐다보신다는 말씀은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즉, 파스칼의 神觀인 구원의 역사 속에 현존하는 아브라함 야곱 이삭의 하느님을 의미합니다.
    몇 해 전 은준관 목사님이 의료원 교수 성경공부 모임에서 강의하시면서 우리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펼치는 하나의 드라마이다.
    성경을 인류 구원의 드라마라는 차원에서 해석하였고 저도 아주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이러한 신앙관에 비춰보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감독하는 구원의 드라마의 연극무대에서 연기를 하는 배우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연극무대에서 혹자는 좋은 역을 배정 받기도 하고 혹자는 악연을 배정 받기도 합니다. 저를 비롯한 연세의료원 가족들은 좋은 역할을 부여 받았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사회적 자아 측면에서 보거나 신앙적 자아 측면에서 보거나 우리의 삶은 한편의 드라마라고 생각합니다. 페르소나를 쓰고 하는 무대는 비극의 드라마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무대는 희극 드라마라는 점에서만 다를 뿐입니다. 배우가 연극이 끝나면 무대에서 내려오듯이 우리들도 인생이 끝나면 무대에서 내려와서 하나님의 평가를 받아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이 때 현세에서의 신분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주워진 역할을 잘하면 상을 받을 것이지만 못하면 벌을 받을 것입니다. 현세에서는 사회적 역할의 차이로 신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고만고만한 평등하고 똑같은 존재들입니다.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갈등도 있고 짜증도 나서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설사 상대방이 잘못을 하여도 화를 내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을 한편의 드라마라고 생각 한다면 상대방이 잘못해도 진짜로 그런 것이 아니고 연기 한다고 생각하여 이해해 주기 바랍니다. 연극하다 상대 배우가 심하게 연기한다고 진짜로 화내는 배우는 없지 않습니까? 화를 내면 자신도 상하게 하지만 분노의 바이러스를 퍼트려서 다른 사람도 상하게 합니다. 불교에서는 탐욕, 분노, 어리석음을 삼독이라고 하여 분노를 죄로 간주합니다.
    연세의료원 가족들이 모두 서로 이해하고 서로 보듬어 줌으로써 협조하고 공존하는 화기애애한 연세의료원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128년 전 이 땅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실현하기 위하여 연세의료원을 건립해 주신 하나님. 연세의료원 모든 가족이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 무대에서인 연세의료원에서 일 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연세의료원 가족 모두가 합심하여 훌륭한 역할을 함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동참 할 수 있도록 많은 능력과 굳센 믿음 그리고 주님의 은총을 주시기를 하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다음글
    다음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2015년 04월 08일 말씀

    콘텐츠 처음으로 이동


    네크워크 링크안내/사이트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