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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7일 말씀

등록일자
2012-11-07
  • 2012년 11월 7일 채플 말씀 영상

    <양희섭 목사 (왕십리 중앙교회)>


    작은 자의 벗, 아벨의 하나님

    누군가에게 정성들여 준비한 선물을 내놓았는데, 그 사람이 외면한다면? 맘이 많이 상할 것 같다. 어느 교우가 부도를 크게 맞아 생활이 어려운 것을 알아 정성껏 용돈을 모아 들고가 기도해 드리고, 봉투를 내놓았더니 그 분이 펄쩍 뛰며 거절하던 일이 생각난다. 그 분은 단순히 펄쩍 뛰는 게 아니라 자존심 상했다는 듯이 기분 상한 것을 내 보인다. 솔직히 내가 더 크게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다.

    성경 창세기를 묵상할 때마다 솔직히 조금은 찝찝했던 것이 가인과 아벨의 제사 문제이다. 어릴 적부터 배운 바로 가인의 제사는 정성이 부족했고, 믿음이 없었고, 피흘림이 없었고, 철저한 회개가 없었고, 가인의 삶에 문제가 있어서 하나님께 외면당했다고 배웠다. 사실이다.


    그럼에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뭔가 좀 아쉽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외면했다? 이해는 되지만 뭔가 좀 석연치 않다.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 그런 쫀쫀한 분인가 하는 맘이 솔직히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세월이 많이 지난 후, 목회 현장에서 말씀을 묵상하는 중, 갑자기 성령께서 다른 면을 하나 보여주신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창4:1-2) 아담과 하와가 자녀를 낳았는데, 가인을 얻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상상해 보니 이런 면이 보인다. ‘가인’, 얻었다는 뜻이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한 남자를 얻었다’는 환희의 외침이다. 그것도 여호와로 말미암아 한 남자를, 아들을 낳았다는 환호이다. 아마도 이전에 하와는 딸들을 낳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은 다음에야 아들 좋은 지 어찌 알겠는가? 후에 가인이 장가를 갔다는 것으로 보아도 이미 딸들이, 여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딸만 낳다가 아들을 하나 얻고는 하와는 환호를 지른다. 아들 낳았다~~! 가인!

    그런데 그 다음에 또 아들을 얻었는데, 조금 분위기가 다르다. ‘아벨’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이 이름은 ‘헤벨’, 또는 ‘하벨’로 발음되는 단어로, 그 뜻은 ‘숨, 허무, 덧없음’이다. 환호도, 기대감도 없다. 왜 그랬을까? 우리 같으면 ‘내가 또 아들을 얻었다’하여 ‘또식이’나 ‘또철이’ 같은 자랑스러운 이름을 붙였을 것 같은데, 하와는 아들을 또 낳고는 ‘허무하다, 허망하다’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왜 그랬을까?
    ‘아벨’의 이름 뜻에는 ‘숨’이란 뜻도 있음에 주목해 보자. 왜 ‘숨’을 생각했을까? 여기서부터는 나의 상상력이다. 왜? 내가 그런 인생이었다.

    내 어머니는 내 위로 여덟을 낳으셨다. 북에서 피난 내려와 고생고생하며 원치 않는 나를 갖게 되셨다. 사는 것이 힘든 그 시절, 떼어버리겠다고 태아를 유산시키는 독한 약을 잡수셨단다. 그럼에도 태아가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북아현동의 산부인과까지 찾아가서 아기를 지우고 싶다고 하자, 그 의사가 그러더란다. ‘이것도 생명인데 하루 더 생각하시고 내일 오시라’고. 집이 신촌인 우리 어머니는 그 다음날, 북아현동까지 가기가 귀찮더란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나를 낳았다. 어떤 아이를 낳았을까?


    내 어릴 적, 동네 어른들은 나를 볼 때마다 신통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셨다. 그리고 나는 이상하게도 발을 삐기를 잘했고, 뜀박질을 못했다. 숨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다. 내 기억으로 초등학교 저 학년 시절, 절반 밖에 학교를 못 간 것으로 기억한다. 왜 그랬을까?

    아기가 태어났는데, 그 독한 유산약으로 인해 뼈마디가 무르고 다리가 휜 아기가 태어났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약골 중에 약골이 태어났다. 부모가 볼 때, 그 아기는 곧 죽을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호적에 올리지도 않았고, 내버려두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세월이 가는데 그 약한 아기가 버틴다. 우리 어머니,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분이시지만 평양 또순이로, 지혜로운 분이시다. 막대기를 구해 나의 휜 다리 양쪽에 부목을 대고 매일매일 발목을 바로 잡아주며 그렇게 키웠다. 훗날에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아버님 유품을 정리하다 내 출생신고서가 발견하였다. 누런 종이에 교직에 계셨던 아버님의 그 바른 펜글씨 한문으로 기록된 출생신고서였는데, 그 한 구석에 이런 메모가 있었다. “1년 뒤에!”


    부모도 기대하지 않은 인생, 태어나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인생, 내버려두면 그냥 한숨과 함께 사라질 인생, 연약하디 연약한, 그야말로 꺼져가는 촛불! 아담과 하와의 집에선 ‘가인’이 모든 것의 중심이었다. ‘아벨’은 늘 뒷전으로 밀리는 주목받지 못하는 인생이었다. 이 분위기가 어느 정도였을까? 아마도 아담과 하와는 태초의 인물이기에 거의 동물적 본능에 가깝지 않았을까 싶다.

    종종 동물의 세계에서 봤듯이 어미 새가 먹이를 물어와 입을 쩍쩍 벌리는 강한 놈부터 먹이고 키우는 모습, 잘 받아먹고 빨리 큰 강한 놈이 같이 태어났으나 약한 동생들을 둥지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이는 모습. 아마도 가인과 아벨의 분위기가 그런 분위기 아닐까?
    자, 하나님께 두 사람이 나아와 제사를 드린다. 잘 나가는 인생 가인과 늘 뒤처지는 아벨. 강인한 가인, 약골 아벨. 잘 생긴 가인, 못 생긴 아벨. 자신만만한 가인, 늘 소심한 아벨. ...

    대조적인 두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와 제사를 드린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누구의 제물을 받으셨다? 아벨! 반드시 그래야 할 이유가 있다? 없다! 그건 완전히 하나님 맘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누구 손을 잡아 주셨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려주는 특별계시의 책 성경은 처음부터 그 하나님은 창조주이면서 동시에 약자를 붙잡아 주시고, 소자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그 부모마저 외면하는 못난 자녀를 영접해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라고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강자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여호와 하나님은 약자의 하나님이시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아사’라는 왕은 이런 기도를 드린다. “아사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힘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 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대하14:11)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강자의 벗이 되어야 할까, 약자의 벗이 되어야 할까? 권세자의 벗이 되어야 할까, 소시민의 벗이 되어야 할까? 큰 자의 벗이 되어야 할까, 작은 자의 벗이 되어야 할까?



    가인의 후예가 되어 아벨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교만한 강자의 논리에 빠지지 말자. 차라리 아벨의 후예가 되어 하나님의 긍휼, 도움을 기대며 살자. 그리고 우리 자신도 그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작은 자의 벗이 되어 진정 하나님의 백성으로 제대로 살자.

    이 세브란스 병원, 이곳에서 일하고 봉사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바로 아벨의 손을 잡아주고, 그 제물을 받아주는 작은 자의 벗, 아벨의 하나님의 손길이다. 이 병원은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으로 세워지고 시작한 병원 아닌가? 삶이 힘들고 연약한 이들이 이곳에 와서 아벨의 하나님의 손길을, 예수님의 손길을 여러분을 통해 접하고 행복해 하며 돌아가는 치유의 역사가 더 많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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