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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16일 말씀

등록일자
2013-01-16
  • 2013년 1월 16일 채플 말씀 영상

    < 이윤재 목사_ 분당한신교회 >
     

    [ 큰 숲 ] 
      

    새해가 밝았습니다. 2013년은 우리가 한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 시간입니다.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축복의 시간입니다. 한 해동안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새해가 시작될 때마다 이런 질문을 합니다. 시간은 연속되는 데 새 해라는 의미가 무엇일까? 작년 12월 31일이나 1월 1일 사이에 큰 시간적 간격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똑같이 1분 60초, 60분 한 시간, 하루 24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12월 31일, 자정을 지나면서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똑같은 시간의 연속인 데 새해입니다. 왜 새해일까? 탈무드라는 책은 아주 방대한 책입니다. 60권 이상으로 된 큰 책입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 책은 처음 표지와 마지막 표지가 없습니다. 첫 번째 책의 겉장과 마지막 책의 겉장이 없다는 말입니다. 왜 그럴까? 하나님은 처음과 나중이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배우는 데는 처음도 끝도 없다는 말입니다. 마지막 장이 없으니 언제나 다시 출발합니다. 그것이 탈무드의 메시지입니다.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가 말했습니다. “내가 삶에 대해 배운 모든 것은 단 세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It goes on’(삶은 계속된다)”. 그렇습니다. 삶도 계속되고 시간도 계속됩니다. 그런데 어제와 오늘이 있고 내일이 있습니다. 1월이 있고 2월이 있고 12월이 있습니다. 봄이 있고 여름이 있고 가을, 겨울이 있습니다. 왜 시간은 계속되는 데 시간이 구분되고 달과 해가 구분될까? 왜 똑같은 시간인데 왜 작년이 있고 올해가 있을까? 제가 아주 중요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새로 시작하라는 뜻입니다. 어제 실패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일 또 시작하면 됩니다. 작년에 마음먹은 대로 안됐습니다. 새해 새로 시작하면 됩니다. 새 출발의 메시지입니다. 매일 새로 시작하고 매월 새로 시작하고 매년 새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새해 첫 주일, 여러분도 새 출발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사실 새로운 것은 시간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야 하고 삶의 자세가 새로워야 합니다.

    새해 새 출발을 다짐하는 여러분을 새해 첫주 뜻깊은 곳으로 인도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나무입니다. 저는 나무를 좋아합니다. 나무는 말없이 그 자리에 서서 저에게 많은 말을 합니다. 하늘높히 찌르는 나무, 소나무, 낙엽송, 가로수, 정원수, 고산에 찬바람을 맞고 서 있는 고목, 광야에 홀로 서 있는 나무, 어떤 나무도 좋습니다. 무엇보다도 나무는 말이 없습니다. 말이 없어도 할 일은 다 합니다. 알아서 자라고 절대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는 그늘과 산소와 열매를 제공합니다. 나무에 대한 시를 찾다가 시인 오세영이 쓴 “나무처럼”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나무가 나무끼리 어울려 살 듯/우리도 그렇게/살 일이다.
    가지와 가지가 손목을 잡고/긴 추위를 견대어 내듯/나무가 맑은 하늘을 우러러 살 듯/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잎과 잎들이 가슴을 열고/고운 햇살을 받아 안 듯/나무가 비바람 속에서 크듯/우리도 그렇게/클 일이다.
    대지에 깊숙이 내린 뿌리로/사나운 태풍 앞에 당당히 서듯/나무가 스스로 철을 분별할 줄을 알 듯/우리도 그렇게/살 일이다.
    꽃과 잎이 피고 질 때를/그 스스로 물러설 때를 알 듯이

    시인은 나무를 통해서 자신을 보고 있습니다. 나무는 그에게 큰 교훈을 주는 스승과 같습니다. 새 해가 시작되어 제가 성경을 읽으려고 창세기를 폈습니다. 그리고 창1장을 읽다가 유달리 한 단어가 눈에 띄였습니다. “나무”란 단어였습니다. 29절입니다. 창1:29,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여기에 “씨가진 열매맺는 모든 나무”라는 말이 나옵니다. 창1장에 “나무”라는 말이 있는 줄 미쳐 몰랐습니다. 29절보다 11절에 가장 먼저 나옵니다. 창1:11,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이것이 성경에 나오는 나무에 관한 첫 번째 기록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첫째날 빛을 창조하시고, 둘째 날 궁창을 만들고 셋째 날 풀과 씨맺는 나무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무는 살아 있는 생물중에 가장 먼저 만든 것입니다. 바다의 고기가 생기기 전에, 공중의 새, 땅에 짐승, 심지어 사람이 생기기전 하나님은 나무를 먼저 창조하셨습니다. 나무의 역사가 그렇게 오래 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나무를 생물중 가장 먼저 만드셨을까? 하나님이 창1장에서 나무를 창조하시면서 우리에게 하시려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단지 “내가 나무를 지었다. 나무를 사랑해라. 나무를 보호해라“. 그런 것일까?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무엇일까? 1장 27절 이하에서 31절을 보면 거기에서 또 나무 이야기를 하면서 2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여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명?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할 사명, 영어로 말하면 Be fruitful, 열매맺으라. Be multiple, 수가 많아지라. Be prosperous, 번영해라.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것은 다만 먹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할 일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한 일입니다.

    그러면서 바로 다음 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씨맺는 나무를 주었다고 말합니다. 왜 하필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말하면서 나무를 이야기합니까? 그나마 그냥 나무가 아니라“씨가진 열매맺는 나무”일까? 자, 28절에서 생육하라. 번성하라. 열매맺으라. 29절에서 “씨가진 열매맺는 나무”, 그렇다면 어떤 메시지겠습니까? 28절이 메시지라면 29절은 그림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가 하나님이 인간을 지은 목적이라면 씨가진 나무는 그것을 그림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여기서 나무는 단순한 나무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그림입니다. 이 복된 새해 첫 주일에 우리가 창1장을 통해 듣는 나무 이야기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이 아침에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살아 있는 생명은 자란다.
    다시 한번 28절을 보실까요?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여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열매맺는 것입니다. 수가 늘어나는 것입니다. 번성하는 것입니다. 먼저 “생육하라”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페루”, 씨를 떨어뜨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 많은 씨를 떨어뜨리기를 원하셨습니다. 씨는 우선 종족 번성을 의미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낳고 그 자녀가 또 자녀를 낳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씨는 종족 번성만이 아닙니다. 가능성의 씨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 창조의 씨를 떨어드리는 자로 지었습니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창조의 씨가 떨어집니다. “번성하라”라는 말은 ”레부“입니다. 이 말은 크게 한다는 말입니다. 점점 커지는 것입니다. 수가 늘고 양이 커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번식“, 혹은 ”배가“라고 합니다. 이것이 ”레부“, ”번성“입니다. “충만하라”는 “말레우”입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 “말레”, “언덕”에서 나왔습니다. 이스라엘을 다니다 보면 “말레”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말레 아둠밈”, “아둠밈 언덕”입니다. 우리 말로 고개, 재입니다. 그러니까 언덕처럼 높이 솟은 곳을 “충만”이라고 합니다. 충만은 언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높은 언덕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언덕은 남의 눈에 띕니다. 높이 솟아 있고 가득차 있습니다. 이것이 “충만”입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창조하신 뜻을 알겠습니까? 생육하여, 씨를 떨어뜨리고, 번성하고, 점점 커져서, 충만, 언덕처럼 커지라고 우리를 창조했습니다.

    이것을 확신해야 한 해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도 신화가 있습니다. 그런데 신화들을 보면 대개 이렇습니다.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은 자기 종을 삼기 위함입니다. 자기가 창조한 인간이 자기에게 잘하고 굽신굽신하고 제사 잘 지내고 충성된 노예가 되는 것, 그것이 대부분 다른 종교에서 신이 인간을 만든 이유입니다. 바벨론 신화도 그렇고 이집트 신화도 그렇습니다.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의 하나님은 다릅니다. 그는 우리를 그의 부하로 삼아 잘 부려먹으려고 우리를 짓지 않았습니다. 다시 28절을 보십시오.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여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고 지었습니다. 엡1:5-6절입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종으로 삼기 위해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아들들이 되게 하시려고 만드셨습니다. 노예로 부려 먹기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려고 창조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해야 합니다. 성경은 곧 번성의 역사입니다. “번성”은 성경의 중심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28절에서 아담에게 “번성하라” 하셨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은 노아에게 번성하라 하셨습니다. 창9:1,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노아 이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번성하라 축복하셨습니다. 창17: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번성의 축복은 이삭에게로 이어졌습니다. 창26:3-4, “내가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리라”. 그리고 야곱에게로 이어졌습니다. 창28:3,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어 너로 생육하고 번성케 하사 너로 여러 민족을 이루게 하시리라”. 야곱은 결국 번성의 축복을 받고 12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들은 곧 이스라엘의 12족장이 되었습니다. 때가 되자 하나님은 야곱의 자손들을 애굽에 이주하게 하셨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요셉의 보호와 후원속에 살았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정착하고 번성한 말씀이 창47:27절 에 나옵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하며 거기서 산업을 얻고 생육하며 번성하였더라”.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은 핍박을 받을 때 더 번성합니다. 애굽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습니다. 출1:7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바로의 모진 핍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망하지 않았습니다. 출1:12절입니다.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하니 애굽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을 인하여 근심하니라”. 여러분은 이 말씀을 새해 벽두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에서 많은 시련을 받지만 결국 최후 승리하리라는 것을 믿습니까? 세상이 악하여 가끔 눌리고 핍박받고 속임당하고 이용당하고 고통을 당하지만 “그러나 학대받을수록, 고통당할수록, 실패할수록, 억눌릴수록” 더욱 번성하고 창대하게 될 것을 믿습니까? 애굽에서 마지막에 고민한 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아니라 애굽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다시 출1:12, ”애굽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을 인하여 근심하니라“. 세상에서 우리가 근심할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근심해야 합니다.

    생명의 씨가 능력이다.
    그런데 번성은 그냥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씨로부터 시작합니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씨없이 번성하는 생명은 없습니다. 그래서 왜 29절에서 왜 성경이 그냥 나무라고 하지 않고 “씨맺는 모든 나무”라고 했는지 드러나게 됩니다. 다시 29절을 보시겠습니까? 창1:29,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가진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하나님이 인간의 번성을 말하면서 그것의 메시지로서 나무를 창조하셨는 데 그 나무는 그냥 나무가 아니라 씨맺는 나무였습니다. 왜 그냥 나무가 아니라 씨맺는 나무입니까? 씨없이는 어떤 생명도 번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1장에는 씨이야기가 6번이나 나옵니다. “종류”할 때 “종”도 씨이기 때문에 창1장에서 씨 이야기가 20번 이상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확신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번성을 위하여 우리에게 생명의 “씨”를 주셨다“. 정말 주의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씨만 주셨지 열매까지 주신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씨는 원료고 열매는 완제품입니다. 2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것이 무엇인지. 창1:29,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열매자체를 주신 것이 아니라 열매가 되게 하는 씨를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며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열매는 안주시고 씨만 주셨을까? 열매를 주시면 그냥 먹으면 되지만 씨는 심어야 하고 물줘야 하고 가꿔야 하는 데 왜 그렇게 하셨을까? 아마 저와 비슷한 질문을 한 여인이 있었나 봅니다. 그가 한번 꿈에 어느 가게를 들어갔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하나님이 거기 서 계셨습니다. 여인이 깜짝 놀라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여기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팔기 위해 여기 있단다”. 그래서 여인이 말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평소에 사고 싶은 것이 있었는 데요”. “뭔데?” “사랑과 평화, 자유와 행복, 그리고 완전한 지혜를 주옵소서”. 그랬더니 하나님이 조용히 미소지으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네가 뭔가 오해하고 있구나. 나는 열매는 팔지 않고 씨만 판단다”. 그래서 여인이 물었답니다. “그러면 열매는 어떻게 됩니까?” 그랬더니 하나님이 말씀했답니다. “열매는 네가 맺히렴”.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랑과 행복과 자유의 열매 자체를 원합니다. 만들어진 사랑, 이루어진 성공, 누리기만 하면 되는 축복, 더 이상 노력할 필요가 없는 성공, 그런데 하나님은 완제품은 팔지 않습니다. 오직 씨앗만 팝니다. 열매는 우리가 씨를 심어 거둬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안에 생명의 씨가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저는 오랫동안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조금 “나는 못한다. 나는 못났다. 얼굴도, 지혜도, 건강도 약하다. 나는 가진 것도 별로 없다” 생각했습니다. 목회자가 된 후에도 한동안 이 열등의식은 계속되었습니다. 키 180센티 이상에 배우처럼 잘 생기고 웅변가처럼 말잘하는 목회자를 보면 “아, 나는 언제 저렇게 되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어느날 성경에 나오는 씨 이야기를 읽다가 생각을 바꿨습니다. 요일3:9절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여기에 “하나님의 씨”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씨는 생명의 씨입니다. 이 생명의 씨가 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씨는 어떤 씨입니까? 벧전1:23절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의 씨입니다. 그 씨는 땅에 있는 씨가 아니기 때문에 썩지 않습니다. 그 씨가 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골3:3절입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여기에 하나님의 생명이 감추어 졌다고 말합니다. 결정적으로 저를 일으킨 것은 “감추어졌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씨가 내 안에 있는 데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평소에는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내 속에 무엇이 있는지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기 속에 분명히 있는 데 없는 것처럼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도 착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속에는 무한한 가능성의 씨앗이 있는 데 “나는 없다. 나는 틀렸다. 나는 못해”하고 스스로 열등의식속에 사는 것 아닙니까?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면 참 신기합니다. 누가 베드로가 초대교회의 지도자가 될 줄 알았겠습니까? 그는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는 작은 어부였지 않습니까? 다. 누가 어부 요한이 박해시대 교회의 지도자가 되고 성경을 다섯 권이나 쓴 위대한 사랑의 사도가 되리라고 생각했습니까? 누가 평양 깡패 김익두가 한국교회 최고의 부흥사가 되고 누가 가난한 구두방 소년 디 엘 무디가 100만명의 전도자가 되리라고 생각했습니까?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었습니다. “내가 네게 씨를 주노라”. 우리안에 하나님의 씨가 있습니다. 그 씨가 숨어 있어서 나도 나를 업수이 여기고 남도 나를 대단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했습니다. “생육하라.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없었으면 그렇게 말했겠습니까? 그 속에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말한 것입니다.

    왜 주님은 간질병 걸린 아들의 아버지에게 막9:23.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왜 말씀하셨습니까? 기도해서 병고치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함께 있으리라” 했습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우리안에 어떤 환경이든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요14:12에서 제자들에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라”하셨는 데 우리안에 하나님을 위해 일할 위대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있습니다. 믿으세요. 있으니까 생육하라. 번성하라. 충만하라 하지 않았습니까?

    나무가 모이면 숲이 됩니다.
    우라안에 있는 생명의 씨는 우리 개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안에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에수님의 몸, 우리와 똑같은 생명체입니다. 몇 년전에 어느 지방을 갔더니 동네안에 작은 교회 하나가 생겼습니다. 2층 상가를 얻어 조그만 간판을 건 교회를 보면서 이 동네에도 교회가 생겼구나 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 다시 그곳을 다시 지나갔는 데 웬일입니까? 옛날에 있던 교회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없어졌나 했더니 바로 옆에 큰 교회 하나가 세워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자라 큰 교회로 번성한 것입니다. 몇 년 전 인도에 갔습니다. 2000년도에 우리 교회가 세운 빨간 벽돌건물교회, 그때 7명으로 시작되었는 데 지금은 35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교회도 몸이기 때문에 생명이 자라면 번성합니다.

    여러분은 교회가 자라고 번성해야 한다고 믿습니까? 초대교회에 하나님의 생명이 임하자 놀라운 번성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 12명이던 교회가 120명이 되고 120명이 500명 되고 500명이 3천명 되었습니다. 그리고 3천명이 5천명이 되고 되었습니다. 그 5천명이 핍박이 오자 두루 퍼져 안디옥으로, 소아시아, 부르기아로, 갈라디아로, 본도로 갔습니다. 핍박 때문에 “흩어진 나그네”들은 마치 민들레 홀씨처럼 온 땅에 날아가 번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소아시아 교회가 되고 에배소 교회가 되고 빌립보교회가 되고 고린도 교회가 되고 갈라디아 교회가 되고 로마 교회가 되고 알렉산드리아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씨앗이 1884년 한국에 떨어져 황해도 솔내에 한국최초의 교회 솔내교회가 세워지고 서울에도 떨어져 새문안 교회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자라고 성장하고 번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듯이 교회도 하나님의 생명이 있어 반드시 자라고 번성하고 열매맺으라고 믿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성도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어 잘되게 되어 있듯이 교회도 하나님의 생명 때문에 자라고 번성하고 열매맺을 것을 믿습니까?

    그런데 번식은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자라든지 어른이 되든지 내가 다른 사람을 낳아 내가 부모가 되든지. 나이가 어릴 때는 자기가 자라 번성합니다 .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 자녀를 낳음으로 번성합니다. 작년에 영국을 방문해 런던에 있는 “태버내클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이 교회는 지금부터 150년전에 유명한 설교가 챨스 스펄죤이 목회했던 교회입니다. 지금부터 약 150년전에 15,000명 들어가는 교회를 지었으니 얼마나 큰 교회인지를 짐작이 가실 것입니다. 그 교회가 2차 대전때 불타고 지금은 1/5사이즈로 지었는 데 그나마 텅비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교회 역사를 알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 교회는 비록 약해졌지만 그 교회가 세운 수많은 교회들이 지금 부흥하고 있습니다. 영국뿐 아니라 독일, 프랑스, 스칸디나비아, 아프리카, 미국, 그 교회가 부흥할 때 세운 수많은 자교회들이 활발하게 부흥하고 성장함으로서 과거 자신들을 낳고 키웠던 영국 태버내클 교회의 사랑의 빚을 갚고 있었습니다.

    중국의 사막에서 나무심은 여인 영상을 보겠습니다. 그녀는 20년간 사막에 나무를 심어 여의도 40배만 땅을 숲으로 가꾸었습니다(영상). 어떻습니까? 위대하지 않습니까? 한 여인의 작은 헌신이 이토록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줄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조건을 다 갖춘 후에 나무 심은 것 아닙니다. 지금 심어야 합니다. 그래야 숲을 이룹니다. 숲은 많은 나무들이 모여 이루어집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숲이 아니라 큰 나무만 있습니다. 숲은 큰 나무, 작은 나무, 단풍나무, 자작나무, 풍뎅이, 모기, 잠자리, 딱정벌레, 지렁이, 산 새, 깔따귀, 모두 다 있어야 숲이 됩니다. 한국교회는 큰 교회와 작은 교회가 함께 어울어져 숲을 이루었다기 보다 큰 나무 몇 그루만 있는 것 같습니다. 대형교회 몇 개가 한국교회 전체인 것처럼 비치고 있고 작은 교회는 큰 교회되려고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큰 나무 몇 개 있는 것이 숲이 아니듯이 큰 교회 몇 개 있다고 한국교회는 아닙니다. 작은 교회와 큰 교회, 중간교회, 그것도 다양한 형태의 교회가 공존하면서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 숲입니다. 올 해부터 우리는 큰 숲 운동을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만 잘되게 하는 관심으로부터 모든 한국교회가 잘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중국 사막에 나무 심는 여인의 비전입니다. 그리고 100년전에 세브란스를 세우신 하나님의 비전입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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