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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7월 02일 말씀

등록일자
2014-07-02
  • 2014년 07월 02일 채플 말씀 영상

    오늘의 이 말씀은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예언자를 보내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길고 긴 노역의 때가 끝이 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다고 선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다고 전하라고 하십니다. 값은 치루어졌으니, 심판은 끝이 났다는 것입니다. 이제 회복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제 다시 삶이 올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가 선포되는 것이지요.


    이 메시지 전에는 범죄한 예루살렘,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가 선포되고, 공의를 저버린 사람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채 종교적인 형식에 머무는 예배에 대해서 역겨워하시는 하나님의 불같은 심판의 메시지가 두렵게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이스라엘을 둘러 싼 열강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가 선언됩니다. 여호와의 심판의 날을 향하여 34-35장에 극적인 긴장이 고조되다가, 36-39장까지 히스기야를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민족의 위기, narrative가 소개됩니다. 일종의 삽입구같은 것이에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묵시적 환상이 펼쳐지는데, 그 예언자 이사야가 서있는 역사적인 현실을 환기시켜주는 것입니다. 그 역사적인 현실은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느끼게 합니다.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 하나님의 선택한 민족 이스라엘은 앗수르(Assyria)의 침공에 의해서 그 성들을 거의 다 빼앗기고 이제 예루살렘 성도 함락되는 것이 목전에 와 있습니다. 앗수르의 장군 랍사게는 히브리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네가 믿는 바 그 믿는 것이 무엇이냐?” 정치적으로는 애굽과 친화정책을 취했던 히스기야의 입장을 비난하면서 애굽이 앗수르의 상대가 되지 않음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신들의 전쟁이었던 고대의 세계관으로 볼 때 진짜 중요한 것은 히스기야가 주도했던 종교개혁이었습니다. 모든 우상들을 폐하고, 오직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종교개혁을 단행했던 것이지요. 그의 이 결정을 비난하고, 그 여호와를 모욕하는 현실을 지금 겪는 것입니다. 이 역사적인 현실이 어떻게 극복되는지에 대한 역사적인 증언을 지나, 오늘 읽는 이 40장, 이 희망의 노래가 이제 새롭게 연주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지난 2 개월 동안 우리는 정치적으로 이 질문을 많이 했습니다. 국무총리의 후보로 오르는 사람마다, 네가 누구냐라는 질문으로 그들을 흔들고 질문하는 이들이 파당으로 나뉘어 다투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쩌면 이 질문은 우리 자신에게도, 여기있는 우리 모두에게 다 해당하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기가 막힌 대답을 한 이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이사야의 예언을 들어서 대답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세례요한이었습니다.


    당시 세례 요한은 전국적인 영향력을 획득한 상태였습니다. 마태복음의 증언을 들어보면, 그의 앞으로 예루살렘과 온 유대, 그리고 요단강 이편 저편에서 사람들이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그의 앞에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습니다. 그는 자기 앞에 나오는 자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거침없이 말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는 너희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니 안심하고 있더냐? 하나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신다.’ 군사들에게도 거침이 없었습니다. 그를 종교지도자들은 두려워했습니다. 심지어 헤롯왕 조차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까? 말하자면 그는 전국구 인물이 된 것입니다. 지도자가 된 것이지요. 사람들은 그가 그리스도인가가 궁금했습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대화를 보면, 이러한 당시의 상황을 분명히 알게 해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제사장과 레위인들, 즉 종교전문가들이 묻습니다.


    세례요한을 향해 질문하면서 너는 누구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대답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였습니다. 이것은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답입니다. 누군가 제게 혹시 누구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제가 “저는 의료원장이 아닙니다.”라고 답한다면, 그것은 제게 당신이 누구냐고 묻는 이의 의도가 “당신이 의료원장이냐”라고 묻는 것임을 알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자 질문과 답이 이어집니다. “그러면 너는 엘리야냐?” 말라기 4장에 나오는 마지막 날의 예언에 관한 질문입니다. 대답합니다. “아니다.” “그러면 그 선지자냐?” 신명기 18장에 나오는 모세와 같은 그 선지자, 이스라엘 민족을 새로운 출애굽으로 이끌 그 선지자이냐는 것입니다. 대답하지요. “아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묻습니다. “도대체 너는 네 자신에 대해서 무어라고 하느냐? 말하라. 우리로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그런데 오늘 세례요한이 기가막힌 대답을 합니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이다. 광야의 외치는 자가 아니라,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소리라고 정의합니다. 소리는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까? 소리는 메시지를 남긴 후 자신은 사라집니다. 소리는 의미를 전달하고 그 자신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고 합니다. 연세의료원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내 최초, 국내 최고라는 말은 연세의료원이 누구인가, 어떤 존재인가를 확인하려는 생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독교 공동체도 이런 주장을 하려고 합니다.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 세계에서 제일 크고 아름다운 교회당을 가진 교회라는 자기 주장, 자기의 존재를 남기려는 결정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토록 남아있기를 바라면서 이런 결정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나를 지키고, 나를 드려내는 생각들이 우리가 제일 먼저 하는 생각과 결정들 아닙니까?


    그런데 세례 요한은 자신이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가 가져왔던 이사야 예언이 말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우리의 인생과 인생의 성취는 풀과 같은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우리가 남기는 이름은 잠시 있다가 사라질 들풀의 꽃과 같은 것이라 전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여호와의 숨결, 바람이 그 위에 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인생은 풀과 같다고 말합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영원할 것 같았던 이름들도 잊혀집니다. 이 역사라는 무대에서 모두가 때가 되면 떠나야 했습니다. 아브라함도 떠났습니다. 다윗도 스러졌습니다. 솔로몬의 영광도 잊혀졌고, 베드로도 바울도 풀이 마르고, 꽃이 시듦같이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퇴장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분명한 현실입니다. 우리에게 큰 힘이 되었던 세브란스씨도 떠났고, 에비슨도 떠났습니다. 오긍선, 김명선 선생님과 우리 앞을 살면서 세브란스를 이루었던 이들도 다 떠났습니다. 아무도 붙잡을 수 없었고, 그 누구도 영원히 머무를 수 없었습니다. 실로 우리 인생은 풀과 같은 것이지요.


    이것이 엄연한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잊고 사는 우리에게 오늘 세례요한이 말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풀과 같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왜 그가 자신을 소리라고 했을까요? 이어지는 이사야의 말씀이 그 답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그렇습니다. 그는 자신이 풀과 같이 마르고, 꽃과 같이 시들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의 인생의 마지막은 목베임을 당하는 것이었지요. 부정한 결혼을 지적한 것에 앙심을 품은 헤롯의 아내의 사주로 그는 어처구니없이 효수당해 죽습니다. 예수님보다 수 개월전에 태어났고,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죽음을 당했으니, 그는 30대 초입에 요절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알았습니다. 자신이 선포하고, 증언할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설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는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증언하고, 그가 오시는 것을 보고 즐거워했습니다. 그의 삶을 통해 그는 증언한 것이지요. 그가 전했던 그 메시지는 지금도 우리에게 살아 전해지는 것이 아닙니까? 그는 풀의 꽃과 같이 스러졌습니다. 그러나, 그가 전했던 그 메시지는 여전히 우리에게 살아있는 것이지요. 그는 이 비밀을 알았던 것입니다. 자신의 삶이 소리처럼 사라질지라도, 자신을 통해 전달된 그 메시지, 그 소식은 영원히 남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아브라함은 갔어도 그가 삶으로 보였던 믿음의 메시지는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있고, 다윗은 스러졌어도 그가 고백하고 노래했던 시편의 고백들을 여전히 우리가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바울은 갔어도 그를 통해 쓰여진 편지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고, 그리고 그 말씀은 영원히 설 것입니다.


    이 노래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도저히 희망할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자들에게 이 희망의 소식을 전하라는 부르심입니다. 그리고 그 길을 평탄케 하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과 공동체, 그 삶을 서로 쪼개놓았던 그 골짜기들, 그 깊은 나뉨의 골짜기들이 메워질 것이다. 그 끝이 정해진 책처럼, 저 차갑게 서있는 운명이라는 벽이라고 절망하는 이들에게 그 벽이 무너졌다고, 치워졌다고 들려주라는 것입니다.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한계들이 무너지는 것이지요. 천년을, 아니 영원토록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내리듯이, 그 누구도 벗기어 낼 수 없었던 불가촉천민의 신분이 복음이 가져다 주는 새 세상에서 벗기어지듯이 산같은 장애가, 저 거칠고 높은 언덕들이 이제 낮아지고, 평탄해 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희망의 소식을 전하는 이에게 지칭하여 이르기를, “외치는 자의 소리여”


    그를 향해 부르기를 “말하는 자의 소리여”라고 하는 것입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사야의 이 예언의 말씀은 초기 예수공동체의 사람들 사이에서 많이 읽어졌을 것입니다. 왜요?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이 자신을 소리라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그후 예수의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소리로 여기며 살았을 것입니다.


    연세의료원은 하나님께서 어둠에 있는 이 민족에게 해방이 왔다고, 이제 그 복역의 때가 끝났다고 선포하는 소리로 부르신 공동체라 믿습니다. 세상도 그것을 알았습니다. 지난 번에 왜 연세의료원이 이렇게 발전해올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삼성의료원의 사장님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연세의료원을 지탱해온 것은 가치였다고 말입니다.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진행될지 아무도 모르지만, 지금 우리가 세상에 전할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경쟁자를 물리치고, 우리 자신을 지키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가, 아니면 영원토록 설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가? 어려움을 겪겠지요. 그러나 그 어려움을 겪어가는 동안에 우리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 앞에 살았던 모든 이들의 진정한 메시지는 오히려 어려움 속에서 울려나지 않았습니까? 고통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메가폰이라고 했던 CS Lewis의 고백처럼, 앞으로 우리가 겪을 어려움은 우리가 누구인지, 진정 무엇을 추구하는 사람인지를 전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소리가 메시지를 전하고, 자신은 사라지지만, 동시에 소리는 전달될 때 비로소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불이 탈 때 불이 되는 것처럼, 소리는 움직이고 역동할 때 비로소 들리고, 살아있는 것입니다. 연세의료원이 우리를 부르신 그 사명대로 결정하고, 행동할 때 비로소 연세의료원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저기 저렇게 우뚝 서있는 암병원은 한국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스피커, 아니 하나님의 메시지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브란스 병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고급스러운 스피커라고 해도 전기가 없고, 음향시그널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것이지요. 이제 우리가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소명을 기억하고, 우리를 만나는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제 그 복역의 때, 그 고통의 때가 끝이 났다고 복된 소식, 희망의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그 작은 소리들이 모여 한국 사회, 절망과 분열의 탄식 소리로 가득한 이 세상에, 이제 살만한 노래, 희망의 노래를 연주해야 합니다.


    오늘 열방을 향해 흩어지는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소리입니다. 가서 여러분을 주장하려 하시지 말고, 소리가 되십시오. 여러분의 섬김이 하나님의 노래가 되게 하시고, 여러분의 결정과 여러분의 행동이 함께 어울려져 낙망하고 있는 이들에게 소망의 노래가 되게 하십시오. 잠시 머물러 있다가 오겠지요. 여러분의 섬김은 풀의 꽃과 같이 시들고, 사라지겠지요. 그러나 여러분들 통해 들린 그 메시지, 여러분이 전한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히 그들 가슴에 남을 것입니다. 그 소리가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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